응원하는 달님 ^^

이진용 <In my memory> 를 읽다. 2019 부산시립미술관 반복과 차이, 시간에 대하여~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이진용 작가는 오브제에 담았다. 그 시간은 기억 속에 형상화 된 작은 물건이고 상징화 된 존재이다. 

아웃포커싱의 또렷한 피사체처럼 투사되어 드러난 장면들이 기억난다. 

점빵(가게) 앞 마루 위에 서 있던 원통 그리고 연필, 리코더와 작은 북, 사촌형이 일본출장을 갔다 와 사준 푸른색 만년필, 담임선생님이 사주신 초록색 문법책, '누나' 하고 불렀던 소피마르소와 여공,  여학생들에게 받은 펜레터, 67번 버스

열살이었나? 가게 앞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그만 아이스크림이 든 통이 넘어져 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겁이 나서 집 다락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주인아저씨가 찾아오셨었다. 내가 지목된 것이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교에서 일어났다. 산수시험을 치르다 연필을 떨어뜨렸다. 그걸 줍다가 부정행위로 오인받아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 쉬는 시간에 머리가 너무 아파 많이 토했다. - 억울함, 내가 아니라고 말을 못했다. 마음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진실게임은 희생자 만들기가 아닐까?

리코더를 잘 불던 6학년 남학생, 기악부에 발탁되어 찾아간 교실에서 유일한 남자라 치게 된 큰 북, 많은 여학생 앞에서 자꾸 틀리는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계속 연습할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 수돗가에 가 물을 틀어놓고 울고 말았다. - 위로, 누가 등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힘겨울 때는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알았다. 

현대자동차 연구원이었던 형이 예쁜 만년필을 선물로 사왔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억지로 뺏어가 장난을 치다 결국 부러뜨리고 말았다. - 상실감, 펜이 아니라 마음이 부러졌다.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홀로 눈물만 흘렸다. 타인의 상처에 둔감한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믿게 되었다.

선생님은 내 맘 아실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주시고 눈을 맞춰주실 때 죽어있던 심장이 살아났다. 선생님이 사주신 초록색 영문법책은 선생님 향기로 가득했다. 선생님이 한 번만 나를 꼭 안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외로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가지는 감정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 방문을 열면 창문 왼쪽에서 미소 짓는 소피마르소 누나가 참 좋았다. 가끔 엄마 대신 가게를 볼 때가 있었는데, 근처 신발공장으로 출근하는 누나들이 물건을 사러 오곤 했다.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에 따듯함과 고단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에서 봄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 그럴꺼라고 생각했다. - 떨림, 이해되지 않는 마음의 흔들림이 사춘기라는 걸 알아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음악잡지에 이름이 나온 이후로 매일매일 펜레터를 받았다. 전국에서 또래 여학생들이 편지를 보내줬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예쁜 손글씨였다. 학교에 갔다오면 편지를 찾아 읽기만 했다. 왜 답장을 안썼는지, 못썼는지 지금도 미스테리다. - 감수성, 센티멘털의 다른 말이 아니다. 잘 반응하는 능력이다. 아마도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였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67번 버스를 타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올 때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여학생들이 타는 것을 보게 된다. 옷을 보면 인문계 여고 학생들은 아니다. 여실 학생들이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우리 또래의 여학생들, 가냘픈 몸에 무거운 발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한없는 부끄러움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 미안함, 어렵다지만 엄마가 챙겨주시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내가 몹시도 미웠었다. 타인의 삶을 보며 스스로가 미워지는 것이 미안함이라는 것을 그 여학생들을 보며 알았다. 

억울함, 위로, 상실감, 외로움, 떨림, 감수성, 미안함. 

다른 모양을 하고 기억 속에 들어온 이 낱말들과 조각조각 흩어져 숨어있던 에피소드들이 '나'란 존재의 아주 작은 부분들을 밝혀주는 촛불이 아니고 무엇일까? 세월에 묻혀 잊어버리고 있었던 하나 하나의 오브제들을 건져올려 보면 나의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있겠지~

'F. R. 다이어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의 습격, 울다  (0) 2019.05.04
삶이 주는 어색함을 사랑하라  (0) 2019.04.27
오래된 미래  (0) 2019.04.21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0) 2019.04.19
하늘빛 바다빛 마음빛  (0) 2019.04.16
너무 예민한 나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0) 2019.04.08